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준(朴炳俊)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2801007
  • 전몰일자 : 19510827

공훈사항

박병준 병장은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럽던 1949년 1월 10일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제17연대로 현지 입대했다. 연대는 건군 초기의 혼란을 안정시키는 작전에 참여하다가, 3월 1일부로 옹진지역에 투입되어 전투를 수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17연대는 1950년 6월 26일 인천으로 철수했다. 이때 박병준 병장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여 10월 초순경 제5사단 수색대로 재배치되었다.
박병준 병장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제5사단은 10월 8일 재창설 후 10월 13일부터 영남 일대의 적 패잔병 및 게릴라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11월 22일까지 후방지역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북진작전에 참가했던 많은 부대들이 중공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철수하고 있었다. 사단은 12월 5일 전방지역으로 투입되어 17번 국도상의 춘천에 배치했다. 사단은 철수 부대의 엄호작전을 실시한 후 12월 13일부로 춘천 북방 38도선 일대의 전선 방어(탑두울-배후령)에 투입되었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사단은 가평-횡성-영주-안흥 일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와 2월 공세를 막아냈다. 이후 사단은 태기산 전투(3월), 소양강-인제지역 전투(4월), 홍천북방지역 전투(5월), 현리-서화지역 전투(6월) 등에 참가하여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했다. 이로써 박병준 병장이 소속된 사단은 장평-봉화봉을 잇는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면서 반격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사단이 배속된 美 제10군단은 8월 초순경에 南으로 만곡부를 이루는 전선을 北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해안분지(펀치볼) 확보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제5사단은 美 제10군단의 예비로서 재편성과 부대훈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8월 중순 장마가 그치자 美 제2사단은 제5사단 제36연대를 배속 받아 8월 16일부터 8월 22일까지 양구 북방의 983고지-940고지-773고지를 잇는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후 이 전선을 사단이 인수 받아 점령했다. 그러나 사단은 이 전선을 8월 27일 적의 파상적인 반돌격에 의해 빼앗겼다. 이 전투에서 박병준 병장은 양구 북쪽 적진에 침투하여 적 연대 지휘소를 파괴하려다가 8월 27일 적 경계병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준 병장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2판-7면-1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3-ㄷ-06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