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주(박병주)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0911
  • 전몰일자 : 19500909

공훈사항

박병주 중위는 1931년 10월 1일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서 출생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북한군의 남진에 밀려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자, 그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중위는 1950년 8월 초순 대구 제1훈련소 내에 재차 개교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단기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8월 하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7사단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7사단은 8월 20일 제3·5·8연대를 주요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어 교육훈련을 하면서 위험 지역에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8사단이 신녕 북방에 투입되어 집중 공격을 가하자 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8월 29일 제7사단 제5연대(-)와 박 중위가 소속된 제8연대 제1대대를 제6사단에 배속했다. 대대는 방가산~화산으로 연결된 646고지 북쪽 능선 상의 무명고지를 점령하고, 제6사단과 제8사단 전투지경선 상에 형성된 공간지대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9월 2일 저녁 북한군의 공세(9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4공격집단은 주공인 제8사단에 전차 21대를 증강시켜 의흥~갑령~신녕~하양 축선에 투입하고, 조공인 제15사단에 전차 5대를 배속하여 죽장~영천 축선에서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제1대대는 조림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침으로써 제6사단의 신녕지구 방어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9월 5일 적 제15사단은 영천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제8사단이 영천 남쪽으로 철수함에 따라 6일 영천이 탈취되었다. 이에 제7사단은 9월 8일 제2군단에 배속되어 영천전투에 투입되었고, 사단은 제8사단과 함께 영천 남쪽에서 혈전 끝에 8일까지 적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써 국군 제2군단이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박 중위는 부대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대원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9월 9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주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2판-2면-68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ㅈ-03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