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윤(朴炳潤)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3833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박병윤 대위는 강원도 삼척군 북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8년 12월 7일, 육사 8기로 입교하여 6개월간의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1949년 5월 23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경기도 시흥에 주둔한 제17연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제17연대는 동년 6월 20일에 서울 용산으로 이동하여 수도경비사에 예속되었고, 11월 15일에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옹진지구전투사에 예속되어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얼마 후 제17연대 장병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고 6월 26일 아침에 인천으로 철수했다. 이후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상주 부근의 화령장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 주력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박병윤 대위가 소속된 제17연대는 8월 7일에 낙동강방어선상의 기계-안강지역에 투입되어 북한군 제12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결국 적의 공세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9월 14일에 부산으로 이동하여 상륙함정에 승선한 후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9월 18일에 인천으로 후속 상륙했다. 그리고 영등포를 거쳐 남쪽으로 기동하여 9월 25일 오후 2시에 신사리에서 서빙고로 한강을 도하하여 남산과 동쪽의 매봉(174고지), 그리고 망우리ᐨ면목동 일대로 진출하여 서울의 동쪽을 탈환했다.
제17연대는 9월 28일 아침에 서울 중심지로 입성하여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고 밤 12시를 기하여 중앙청 및 경무대 경비임무를 해병대로부터 인수했다. 이후 11월 7일에 서울에서 제2사단이 재창설될 때에 박병윤 대위는 제31연대 창설 중대장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그리고 제31연대는 홍천 일대로 이동하여 병참선 차단 및 보급품 습격 등 후방교란 활동을 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할 때에 제2사단은 12월 8일부로 양문리-탑두울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얼마 후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서울을 주공격 방향으로 하여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감행했다. 박병윤 대위가 지휘하는 중대는 방어진지에서 적의 압도적인 병력에 의한 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되면서 철수를 시작했다. 중대는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청평으로 철수하던 도중에 후방을 차단한 적 부대를 치열한 전투로 돌파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윤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충무무공훈장(훈기번호 3546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47판-2면-182호)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8-ㅇ-03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