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원(박병원)

  • 군별 : 육군
  • 계급 : 소위
  • 군번 : 207535
  • 전몰일자 : 19510516

공훈사항

박병원 소위는 1929년 10월 6일 경상남도 창원군 동용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한·중 국경선 부근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소위는 육군군의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1950년 12월 28일 군의 소위로 임관하여 제1103야전공병단 군의관으로 배치되었다.
한편, 군의학교는 전쟁이 발발하자 7월 9일 임시 폐교되고 제1야전의무단으로 재편성되었다가, 대폭 증가되는 의무병과 장병 육성을 위해 11월 7일 제1야전의무단을 해체하여 서울 종로 중앙중학교에서 육군군의학교로 재창설되었다.
박 소위가 제1103야전공병단에 전속될 무렵 유엔군이 38도선 일대에서 방어 준비 중이었고, 제3군단은 12월 중순 제2·5·8사단을 배속받아 최초로 가평-춘천 정면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가했고, 유엔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37도선 일대로 후퇴했다. 이때 제3군단은 미 제8군의 작전 방침에 따라 영월로 철수했다. 이후 군단은 제3·7·9사단으로 영월전투, 홍천전투, 횡성전투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공병단은 전투 병력의 신속한 기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 보수에 주력하면서, 때로는 직접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미재 고개가 적에게 선점된 가운데 군단은 수많은 인명 손실을 입으며 방태산을 넘어 철수했다. 박 소위는 군의관으로서 부상을 입고 밀려드는 장병 치료에 눈코 뜰 새 없이 동분서주하면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군단의 전투력 유지와 부상 장병 치료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현리 전투에서도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분전하다 부상당한 장병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적탄에 맞아 5월 16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원 소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130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ㅎ-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