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용(朴炳龍)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3904714
  • 전몰일자 : 19510829

공훈사항

박병용 하사는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49년 8월경 제3사단에 입대하여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하사는 1950년 4월까지 경북 일대 공비소탕작전에 앞장섬으로써 북한군의 후방교란 기도를 분쇄하는 데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2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고양, 한강방어선의 금곡리, 풍덕천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조치원-청주-보은 일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연대는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하여 7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동해안 축선의 강구, 영덕, 흥해, 포항, 형산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뺏고 뺏기는 공방전 끝에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도 23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박 하사와 연대 장병들은 진격하여 강릉(30일)을 탈환하고,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일일 평균 24km의 속도로 북진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30일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 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연대는 이곳에서부터 평창-횡성-현리 일대를 오르내리며 북한군 및 중공군과 공방전을 펼쳤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강원 인제군 한계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4월 22일 시작된 중공군 제5차 공세(4월 공세) 때 연대는 인제의 한석산, 가리봉 일대에서 북한군 제6사단을 물리쳤다. 5월 16일 중공군 제5차 공세(5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사단의 유일한 보급로 상의 오미재 고개가 차단당한 가운데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받자 장병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방태산으로 후퇴하여 하진부리로 철수했다.
현리전투 결과로 5월 25일 제3군단이 해체되고, 제3사단은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었다. 연대는 양양, 고성 일대에서 10월 19일까지 제1군단의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했다. 박 하사는 매 전투 솔선수범하여 진두에 나섰고, 8월 29일 실시된 보급로 경계작전 간에도 솔선수범 앞장서다가 적 정찰대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용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47묘역-7판-1018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7-ㅁ-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