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용(박병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3925
  • 전몰일자 : 19530108

공훈사항

박병용 일병은 경기도 광주군(現 광주시)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및 세부 출생 장소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던 1950년 9월 하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이후 박병용 일병은 헌병으로 분류되어 다시 부산에 있는 헌병교육대에서 헌병임무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배우고 同 교육대 조교요원으로 자충되었다. 그는 야전헌병 양성을 위해 전념을 다해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한편 육군직할 헌병사령부는 美 군정 시절인 1947년 3월 15일에 군감대로 설치하여 운용하다가 1948년 3월 11일에 군기사령부(조선경비대)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12월 15일에 병과 명칭을 헌병으로 변경했다. 이후 1949년 1월 16일에 서울 용산에서 헌병학교가 창설되어 운영되다가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13일 임시 폐교되었다. 그러나 야전헌병 양성을 위해 8월 27일부터 1951년 6월 20일까지 부산에서 헌병교육대를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육군헌병학교를 대구에서 재창설했다.
박병용 일병이 교육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한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24일과 11월 24일 두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 후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중순까지 38도선 일대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차후에 있을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박병용 일병은 헌병요원들과 함께 후퇴하는 병력 수습과 교통통제, 낙오자 통제 등의 임무를 완수 후 12월 중순경 부산에 위치한 헌병교육대로 복귀했다.
이후 헌병교육대는 1951년 6월 20일 부로 해체되고 동시에 대구에서 육군본부 직할로 헌병학교를 재설치하여 운영했다. 당시 후방지역에서 북한군 유격대와 좌익 빨치산 세력들의 습격, 파괴활동이 중공군이 참전하자 더욱 심해졌다. 이에 대구에 위치한 헌병학교는 헌병요원 양성을 위한 교육훈련에 전념하면서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자체방어도 수행했다. 박병용 일병은 부대원들과 함께 1953년 1월 8일 야간 헌병학교 인근에 게릴라가 출몰하여 이들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헌병학교 조교 및 기간요원과 함께 색출된 게릴라들과 교전하던 중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용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3판-32면-1721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7-ㅁ-012)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