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옥(朴炳玉)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9901874
  • 전몰일자 : 19510520

공훈사항

박병옥 이등중사는 1931년 9월 29일에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던 1950년 7월 13일, 경북 대궁의 제25교육연대로 입대하여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제7연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었다.
박병옥 이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8월 초, 제6사단은 용기동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8월과 9월에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9월 16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에 제6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였고, 10월 23일에 희천을 점령했다. 이곳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을 향해 두 차례에 걸친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와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제6사단은 시변리-고랑포 지역으로 철수하여 12월 중순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를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박병옥 이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부대 이동 간 항상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망을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맞아 처음에는 격퇴했으나, 계속되는 공격에 역부족으로 다음 날인 1951년 1월 1일에 방어진지에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맞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6일에 화악산까지 진출했고, 4월 21일에는 사창리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은 4월 22일부터 4월 공세를 시작했다.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후방이 차단되는 등 큰 위기가 도래하여 가평 부근으로 철수했다가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중공군은 5월 16일부터 5월 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제6사단은 이를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했다. 박병옥 이등중사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제6사단과 제7연대 간에 통신망 설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적 침투부대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옥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0판-3면-04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ㅍ-09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