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열(朴炳烈)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K1136875
  • 전몰일자 : 19530721

공훈사항

박병열 일등중사는 1929년 10월 22일에 경상남도 울산군 풍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1950년 8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에 배치되었다가 육군의 병력배치조정에 의거 제6사단 제7연대로 전속되었다.
박병열 일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초순, 제6사단은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이후 유엔군은 10월 25일에 압록강을 향한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와 11월 24일에 2차 총공세(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이때마다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동두천-전곡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맞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1951년 6월 15일에 백암산을 좌우로 잇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 시기에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박병열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몇 번의 부대교대를 거쳐 1952년 4월에 765고지-교암산을 주저항선으로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그는 대대 장병들과 함께 방어지역 전방의 전진기지인 575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고지는 대치하고 있는 적들에겐 눈엣가시처럼 돌출되어 있었다. 중공군들은 이 고지를 빼앗기 위해 4월 16일에 야간 기습공격을 실시하여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벌어졌으나 결국엔 지켜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박병열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의 담당 지역에서는 1953년이 되어서도 큰 전투 없이 전선의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중공군 2개 사단의 기습공격을 받고 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주파령-적근산을 잇는 선으로 철수했다. 그가 소속된 제7연대는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제5사단에 배속되어 백암산전투에 참가했다가 주파령-적근산 진지로 복귀했다. 이후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작전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7월 21일에 방어지역 전방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며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열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0735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6-ㅎ-05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