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연(朴炳淵)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6391
  • 전몰일자 : 19501126

공훈사항

박병연 중위는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박 중위는 사병으로 복무하다 장교를 지망했고, 1950년 11월 15일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하여 제7사단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밀려 청천강 일대에서 적과 공방전을 펼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7사단은 개천 비호산전투를 끝내고 평안남도 덕천 일대에 집결하여 차후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공군 제38군은 희천 지역에서 부대를 재편성 중이었고, 제42군은 구장동-운산 사이에 있었다. 그들은 공세를 취할 때 국군 제2군단을 유엔군 전선에서 취약점으로 보고 제7사단과 제8사단을 집중 공격하려 했다. 이때 사단은 약 35km의 전투 정면에서 좌전방에는 제3연대가 안상리-장하리를 점령하고 있었고, 우전방에는 제8연대가 풍전리-신덕리 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단 예비인 제5연대는 서창에 위치했다.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사단은 11월 22일 기동을 개시했다. 이날 제8연대는 하령곡산-사항산 간을 점령했다. 23일 묘향산 일대에 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다는 적정을 확인한 후, 이튿날 제8연대는 묘향산 남쪽의 가마봉과 동쪽의 백애산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대는 목표 지점에 근접하기 전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공격이 중지되었다. 25일에도 사단은 공격을 계속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사단 좌측의 미 제2사단 38연대와 우측의 제8사단 제10연대도 목표 고지의 7부 능선에서 접전을 펼치고 있을 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26일 새벽 2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이 사단 우측의 제8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집중 돌파하면서 덕천 동쪽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제8연대는 사항산 계곡을 탈출하여 4km 후방의 추동리로 후퇴했다. 하지만 진지를 구축하기도 전에 배후로 침투한 중공군의 기습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연대는 또다시 산길을 따라 서쪽의 신풍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사단사령부도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연대는 일부는 북창으로, 일부는 개천 방면으로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박 중위는 부대 전입한 지 며칠되지 않았지만, 소대원을 이끌고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11월 26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연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7판-7면-05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0-ㄱ-06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