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식(朴炳植)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위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박병식 경위는 1924년 12월 28일 경기도 옹진군 흥미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기도경 옹진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옹진군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박 경위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치안국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4월 20일 제8·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강원도 영월과 춘천지역에 배치하는 등 전·후방의 치안확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38도선 접경지역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 강화명령을 내려 북한의 군사동태를 잘 살피도록 하였다.
옹진반도에는 독립 제17연대가 45km에 달하는 광정면방어(廣正面防禦)에 제2대대(옹진 북방)와 제1대대(강령 북방)를 배치하고, 제3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6월 25일 오전 4시부터 30분 동안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기병대(전쟁 초기에 운용)를 앞세워 태탄군-옹진군 접근로를 따라 공격하고, 전차를 선두로 한 주공은 벽성-강령 축선을 따라 공격하였다.
옹진경찰은 주요 시설 경비와 해안경비를 강화하며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제17연대 좌전방의 제2대대장이 전사한 지 얼마 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연대의 예비대와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측 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이 기세를 이용하여 군경부대가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벽성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하여 옹진반도를 지탱할 수 없게 된 독립 제17연대와 옹진경찰은 지연전을 펼치면서 부포항으로 철수하여 6월 26일 오전에 해군함정 편으로 해상철수를 개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박 경위는 6월 25일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지연전을 펼치며 부포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과 교전이 벌어져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식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ㅋ-06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