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소(박병소)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202334
  • 전몰일자 : 19510316

공훈사항

박병소 대위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대위는 예비역이었으나, 1950년 9월 중순경 재소집에 즉각 응하여 제3사단 병기중대에 배치되었다.
박 대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낙동강방어선에서 총반격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제3사단도 연일을 탈환한 후 반격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으로, 22일부터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은 23일부터 추격작전을 전개했다. 사단은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하여 영덕, 울진, 삼척, 강릉을 차례로 탈환하고, 10월 1일 인구리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북진함으로써 최초의 38도선 돌파부대가 되었다. 박 대위와 사단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동해가도를 따라 진격하여 10월 10일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원산을 점령했다. 사단은 길주-백암으로 북진하여 11월 25일 백암을 확보하고, 계속 북진을 하는 중에 30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철수명령이 하달되었다. 사단은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구룡포, 묵호, 부산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사단 장병들은 분전하다 진지가 돌파당하자 평창으로 철수했다. 사단은 1951년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사단은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으나, 적의 집중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당하자 12일 원주로 철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3월 7일부터 31일까지 리퍼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평창군 하진부리, 유천리 일대를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여 3월 말 38도선 상의 현리-하림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부대 이동이 빈번한 상황에서 예하부대에 적시적인 병기 보급과 정비 지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박 대위는 동분서주하며 제때 병기 정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하부대에 병기 정비를 위해 이동하던 중 적의 습격을 받고 3월 16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소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7판-6면-05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3-ㅈ-03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