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선(朴炳璇)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22

공훈사항

박병선 경사는 1918년 2월 15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충남도경 태안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곡성에서 전사했다.
제주 4·3사건(1948년)과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서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박 경사는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1949.12.16-1950.2.28.)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자 충남경찰 비상경비사령관은 예하 경찰관서에 특별경계로 적의 오열과 지방공비를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충남경찰은 군의 요청에 따라 경부선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수행했으며, 7월 11일 제1대대(충남·서울경찰)를 청양에, 제2대대(충남·경기경찰)를 홍산에 배치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군과 함께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1대대는 예산 방면에서 남진 중인 적 유격대를 급습하여 20명을 생포했고, 홍성군 산성면에서는 적과 교전하여 포로 50명, 사살 2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7월 15일 제1대대는 대천으로 전진하여 오후 4시 대천 동쪽 능선에서 취식 중인 적 수십 명을 발견하고 은밀히 포위 급습하여 적병 3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이때 대천 인민위원장과 자위대 간부 등 지방공비 40명도 사살하고 무전기 1대와 소총 8정을 노획했다.
그 후 박 경사가 소속된 태안경찰은 7월 18일 정읍을 거쳐 7월 21일 남원에 도착하여 7월 30일까지 다른 경찰병력(경남·서울·충남)과 함께 육십령 방어작전을 수행했다. 7월 30일 진주가 포위되어 경찰 1,000여 명과 군병력 1,000여 명은 7월 31일 의령으로 철수했다. 합천으로 집결한 충남·서울·전북의 경찰병력은 일부는 고령으로, 일부는 창녕으로 낙동강 동안으로 이동했다. 고령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던 태안경찰은 8월 4일 함안으로 후퇴하여 낙동강 방어작전에 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9월 16일 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을 개시함에 따라 태안경찰도 9월 17일 함안을 출발하여 태안을 향했다. 태안경찰이 곡성을 지날 무렵 9월 22일 잔적의 공격을 받고 쌍방 간 교전이 벌어졌다. 박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선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05묘역-2판-5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5-ㅌ-06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