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무(박병무)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15521
  • 전몰일자 : 19500710

공훈사항

박병무 중위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49년 5월 중순에 국가의 간성이 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동래의 육군보병학교로 입교하여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49년 11월 17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수도사단 제2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병무 중위가 전선에 부임할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북한의 무장공비와 남한 내 공산주의자 등에 의해 발생한 소요 사태로 인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박병무 중위가 소속된 사단은 38도선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없었다.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계속되는 난항 속에 북한군은 6월 27일 저녁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28일 새벽 서울에 진입하였다. 박 중위와 장병들은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삼송리를 거쳐 행주로 철수해 한강을 도하하였다. 이어 김포공항을 점령한 북한군 제6사단과 격돌하였다.
박병무 중위의 진두지휘 아래 장병들은 오류동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후 7월 3일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지연전 및 재편성을 병행하며 시흥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사단은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으로 철수하였다.
박병무 중위는 장병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는 훌륭한 소대장이었다. 그는 위기에 놓인 조국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1950년 7월 10일 함곡리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무 중위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6731 국)을 추서하고 유해(15묘역-6판-46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ㅁ-01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