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돈(朴炳敦)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32124
  • 전몰일자 : 19520819

공훈사항

박병돈 이등중사는 경상남도 양산군 원내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9월 20일에 카투사(KATUSA)로 분류되어 미 제3사단으로 배치되었다.
박병돈 이등중사는 미 제3사단에 배치된 카투사 병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부대에 합류했다. 당시 전투준비를 마친 미 제3사단은 11월 5일에 일본을 출항하여 17일에 원산으로 상륙했고, 이후 미 해병 제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11월 20일에 함흥으로 이동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11월 27일에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된 채 함흥으로 철수를 해야 했다.
박병돈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3사단은 흥남-함흥 외곽선을 점령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항만을 보호해야 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2월 15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부터 국군 수도사단·미 제7사단 순으로 철수했고, 사단은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하여 12월 24일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사단은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1951년 1월 7일에 평택 일대로 투입되었다. 이후 1월 25일 반격작전 시에 남한산성 방향으로 공격하여 2월 10일에 한강 이남을 확보했고, 2월 1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시에 경기도 광주 일대로 철수했다. 이어 3월 7일부터 동두천까지 진격했고, 계속 공격하여 4월 21일에 ‘철의 삼각지대’에 근접했다.
미 제3사단은 4월 22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4월 공세’로 다시 철수하여 미 제9군단의 예비로서 서울 이남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로 동부전선에 대규모 돌파구가 형성되자, 5월 20일 저녁 8시부로 돌파구 첨단지역인 속사리로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5월 21일부터 반격하여 풍암리를 거쳐 운두령 방향으로 진격하여 5월 22일 저녁에 운두령을 확보했다.
박병돈 이등중사가 소속된 미 제3사단은 5월 29일부로 운천으로 이동했고, 6월 3일부터 철원 방향으로 공격하여 고대산(464고지)를 탈취하고 방어로 전환했다. 이후 휴전협상 진행으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사단 장병들은 진지보강과 수색작전 활동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소대는 1952년 8월 19일에 작전지역 내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돈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90-ㅌ-09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