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담(朴炳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61437
  • 전몰일자 : 19510219

공훈사항

박병담 일병은 1933년 8월 15일 경상북도 대구시 칠성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초순, 대구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여단 제7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병담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었을 때, 제6사단 장병들은 8월 한 달 동안 신녕 북방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낙동강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후 북한군은 9월 2일 오후 6시를 기해 격렬한 9월 공세를 개시하여 일거에 부산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이에 제6사단은 무모하리만큼 계속된 북한군의 공격을 항공 및 포병화력을 퍼부어 격퇴했다. 북한군은 아군 화력에 큰 피해를 받고 9월 12일 이후부터는 공세를 취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낙동강선에 배치되었던 국군과 미 제8군은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9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반격작전을 개시했다. 낙동강에 배치되었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것도 모르고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9월 21일이 되자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6사단 장병들은 북한군을 추격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0월 5일에는 38선을 돌파하고, 제7연대 제1대대는 26일에 초산을 점령한 후 압록강변에 도달해 국경선 경비임무에 돌입했다.
중공군은 은밀히 압록강을 도하여 적유령 산맥 일대에 숨어 있다가 10월 26일에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는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했다. 제7연대는 27일부터 30일까지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공군의 대병력과 맞서며 철수를 감행했다. 박병담 일병은 장병 몇몇과 함께 험준한 산로를 따라 130km의 원거리를 탈출하여 개천에 집결했다. 그는 철수하던 중 적 차단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투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경주에 위치한 제18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박병담 일병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51년 2월 19일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담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85-ㅁ-05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