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구(朴炳口)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7946
  • 전몰일자 : 19520904

공훈사항

박병구 일병은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3차 공세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하던 1951년 1월 중순, 제주도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재창설부대인 제2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박병구 일병이 부대로 배치되었을 때인 2월 중순, 제2사단은 안동 부근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하고 있었다. 사단은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하고,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이곳에서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6월 중순에는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유엔군 사령관은 전선의 소강상태가 장기화 되고, 공산군은 이틈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자,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킴과 동시에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방어진지 전방에 대한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군단 계획에 의거 10월 13일부터 김화-금성진격작전을 개시하여 1단계로 복정령과 492고지를 점령하고, 2단계로 522고지-477고지-하진현 선을 10월 18일까지 점령했다.
박병구 일병이 소속된 공병소대는 전방연대를 직접지원하여 공격을 선도했다. 항상 공격작전 시에는 최전방에서 장애물을 개척하며 공격을 선도하고, 방어작전 시에는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다가 제2사단은 1952년 3월 10일부로 미 제9군단으로부터 배속해제 되어 사창리 일대로 이동했다. 사단은 사창리 일대에서 야외기동훈련(FTC)을 실시했다. 이는 전선의 교착으로 별다른 전투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군 강화와 추후 있을지도 모르는 공산군의 공세에 대비하는 전략적인 목적 아래 취해진 훈련이었다.
제2사단은 1952년 6월 1일부로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김화 동쪽의 남대천 일대 주저항선에 배치되어 있던 미 제40사단의 진지를 인수했다.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따라서 진지 보강과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박병구 일병이 소속된 공병소대는 사단지휘소 부근에 적 침투를 거부하기 위해 수색작전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9월 4일에 소대원들과 함께 김화 부근의 사단 후방지역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그는 전투 중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20-ㅌ-02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