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교(朴炳敎)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10401

공훈사항

박병교 순경은 1914년 8월 7일 황해도 객산군 곡산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으로 재직 중 서울 영등포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6일 의정부가 점령되어 서울이 위협을 받게 되자 서울시 비상경비총사령부 산하 경찰병력 7,000여 명(박 순경 포함 )이 서울 방어를 위해 서울 외곽에 배치되었다. 6월 30일 적 1개 대대가 김포 방면에서 오류동을 목표로 공격을 하였고, 7월 1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아군 군경부대의 용감한 전투로 방어진지를 고수했다.
7월 3일 적이 17대의 전차로 경인가도에 진출하여 도로를 차단하자 영등포를 비롯한 오류동의 아군 방어선이 무너져 서울경찰은 부대별로 수원으로 퇴각했다. 7월 4일 수원을 점령한 적이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진했다. 이에 비상경비총사령부는 서울경찰(박 순경이 포함된 200명)과 충남경찰(300명)을 제1대대, 경기경찰(300명)을 제2대대로 편성하여 청양-대천 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7월 10일 예산 방면에서 적이 남진 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제1대대(서울경찰)는 운곡지서 대원들과 합동으로 매복작전을 하여 적 20명을 생포했다. 이어서 7월 15일에는 대천 동쪽 능선에서 적 수십 명을 발견하여 3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9월 15일 개시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시에 진입하여 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할 무렵 박 순경은 9월 22일 서울로 복귀했다. 적은 의정부와 동두천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나 상당수의 적은 여전히 서울 시내에서 저항을 하고 있어서 서울의 각 경찰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로 인하여 서울의 경찰병력은 1월 3일 한강을 도하하여 수원에 집결하였다가 1월 7일 대전을 거쳐 1월 8일 대구로 후퇴했다. 서울시경은 경찰병력을 18개 대대로 편성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한 중요 거점지역에 배치했다. 박 순경은 울산을 담당하는 제102대대에 편성되어 오열을 탐색하기 위한 검문검색과 군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월 25일을 기하여 국군·유엔군의 재반격이 개시되자 서울 경찰병력은 3월 15일 관할 경찰서를 수복하고 치안유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4월 1일 영등포 일대에서 잔적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서울시경은 영등포·동작·서대문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적을 격멸토록 했다. 이날 박 순경은 잔적을 소탕하던 중 적의 총탄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교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1면-11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ㄱ-05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