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범은(朴範殷)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K1105375
  • 전몰일자 : 19511004

공훈사항

박범은 하사는 1933년 5월 17일에 경상남도 김해군 이광면(現 김해시 이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작전으로 전환하던, 1950년 9월 20일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카투사(KATUSA, 주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병으로 차출되었다. 박범은 하사는 美 제1기병사단에 배치되어 적정탐색, 포로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국군 제6사단으로 전속되어 제7연대로 재배치되었다.
박범은 하사가 연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 편성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북진작전에 참가했던 제6사단은 38도선으로 후퇴하여 1950년 12월 중순경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마침내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시작했고, 1951년 2월 공세와 4월 22일부터 시작된 4월 공세로 사단은 사창리에서 큰 피해를 받고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이에 제7연대는 5월 25일 가평-춘천 사이 산악지대인 계관산-북배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5월 28일 구만리발전소까지 진출했다.
계속해서 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인 김화 및 철원을 확보하기 위해 6월 5일부터 백암산에서 화천으로 뻗어 내린 643고지-887고지-992고지-취봉 방향으로 공격했다. 6월 10일까지 계속된 공격에서 취봉을 확보하고, 15일에는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함으로써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연하는 선을 점령했다.
이후 전선은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노력을 집중하자, 유엔군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별로 진지 전방에 대한 공세 활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방어진지 전방의 강원도 철원군 등대리 부근에 위치한 819고지를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9월 21일부터 28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탈취했다. 그 후 사단은 진지보강과 수색정찰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박범은 하사는 분대원을 통제하며 9월 29일 수색정찰 중 적과 조우하여 교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서울특별시 삼청동에 위치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병원에서 정성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4일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범은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40판-5면-17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6-ㅎ-10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