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문칠(朴文七)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2420
  • 전몰일자 : 19500901

공훈사항

박문칠 일병은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던 1950년 8월 중순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사단은 초기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부대의 재편과 보충을 통해 전쟁 전의 수준을 회복하였으나 대부분 신병이어서 전투력이 미약한 상태였다. 그 시기에 입대하였던 장정들은 기초군사훈련 과정조차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전선에 배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박 일병 역시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전선에 배치되었다.
박문칠 일병은 기계 전투에 투입되었다. 박 일병이 소속된 연대병력은 기계 부근에서 18일 미명부터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면서 오후 무렵 기계로 진입하여 잔적을 소탕하였다. 적은 탄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전투의욕을 상실한 채 많은 전사자를 시내에 남겨두고 일부 패잔병만이 시급히 후퇴하고 있었다. 적 제12사단은 기계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비학산 일대로 철수하였다.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20일까지 잔적소탕을 완료하고 기계 북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후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24일 비학산 일대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지형을 이용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박문칠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9월 공세의 일환으로 북한군 제12사단이 비학산 일대에서 공격해 오자 안강을 포기하고 경주 북방에 있는 낙산(호명리)으로 철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박 일병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임했던 박문칠 일병은 1950년 9월 1일 안강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문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7판-2면-14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3-ㄱ-01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