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문식(박문식)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2966
  • 전몰일자 : 19501005

공훈사항

박문식 중위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박 중위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장교가 되고자 1950년 9월 초순경 공병사관후보생으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단기간의 군사교육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3사단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가 연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제3사단은 형산강 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접전 중인 상황이었다. 이곳에서 사단은 9월 14일까지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총반격 태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박 중위와 사단 장병들은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적과 싸웠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으로 전환했고, 제3사단은 9월 17일 형산강을 도하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이때 적 제5사단도 쉽게 물러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을 하면서 지연전을 전개했다. 아군은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과 공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며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치고 20일 포항을 탈환했다. 북한군은 전면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사단은 여세를 몰아 9월 22일 흥해까지 진격했다.
9월 23일 사단은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박 중위와 사단 장병들은 계속 파죽지세로 나아가 장사동-평해-울진-삼척-강릉(30일)을 적의 큰 저항 없이 탈환하면서, 일일 평균 17.3km의 속도로 진격했다.
동해안 축선에서 후퇴 중이던 북한군 패잔병들은 박격포와 76mm 대전차포로 국군의 추격을 견제했다. 또한 도로에 수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요소마다 엄체호와 교통호로 보강된 견고한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국군의 진격을 저지 또는 지연하려 했다. 사단은 이러한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했다. 사단 장병들은 사기충천하여 2일 양양을 점령하고, 거진을 거쳐 5일 장전에서 적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제압하고 계속 북진했다. 장전전투에서 박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장애물을 제거하다 적탄에 맞아 10월 5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문식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685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2-ㅂ-08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