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문수(朴文壽)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1947
  • 전몰일자 : 19501109

공훈사항

박문수 일병은 경상남도 함안군 군복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중순, 경기도 포천의 제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에 배치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했을 때, 제9연대는 신속히 천주산(434고지)-가랑산(350고지) 간의 주방어진지를 점령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어 오후 4시경에 태릉으로 철수하여 불암산 동남쪽 210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강교가 폭파되자 6월 28일 아침에 망우리고개-용마산을 거쳐 광나루로 철수했다. 이후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를 재편성할 때에 제9연대는 해체되고, 장병들은 수도사단 제1연대에 편입되었다.
박문수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7월 6일 진천으로 이동하여 14일까지 북한 제2사단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이후 7월 28일에 안동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리고 제1연대는 8월 13일에 안강 지역으로 투입되어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9월 2일에 시작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여 저항했으나, 9월 4일에 형산강 이남의 호명리 선으로 철수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유엔군이 반격할 때에 후방지역작전을 위한 제11사단을 창설하기로 했다(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7호’). 이에 9월 25일부로 대구에서 사단 본부를 편성하고 예하 부대로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편성했다. 당시 박문수 일병은 제9연대 창설요원으로 전속되었다. 제9연대는 10월 3일에 지리산 동남쪽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행정기관을 복구하고 적정을 수집하는 한편, 소규모 토벌작전을 병행했다.
제11사단은 11월 1일부터 2단계 작전으로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적극적인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했다. 박문수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11월 9일에 공비 토벌을 위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1개 소대 규모의 적 게릴라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로 격멸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문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2판-5면-08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2-ㅂ-08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