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무용(朴戊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상병
  • 군번 : 0175532
  • 전몰일자 : 19510205

공훈사항

박무용 상병은 1930년 5월 20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상병은 1950년 10월 14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이어 제301공병교육대에서 공병 주특기 교육을 받은 후 제1103야전공병단에 배치되었다.
제1103야전공병단은 1950년 11월에 창설되어 제3군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3군단은 1950년 10월 16일, 서울에서 신편된 제5사단(1950. 10. 8. 재창설, 대구)과 제11사단(1950. 8. 27. 창설, 영천)을 배속받아 창설되었다.
박 상병이 제1103야전공병단에 배치될 무렵 유엔군이 평양 북방으로 진격 중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1103야전공병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후방지역에서 잔적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3군단은 서울-춘천-인제-양양 선 이남의 유엔군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여 12월 10일까지 공비토벌작전을 했다.
10월 하순 한·중 국경선 부근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1, 2차 공세에 밀려 평양과 흥남 일대에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20일경 임진강 하구~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잇는 선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3군단은 12월 10일 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한 제9·11사단을 육군본부로 원복 조치했다. 그리고 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5·8사단을 배속받아 최초로 가평-춘천 정면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쳐 3차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군단은 제2사단을 좌전방, 제5사단을 중앙, 제8사단을 우전방에 배치하여 방어에 임했다. 군단은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미 제8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영월로 철수했다. 이후 군단은 1951년 1월에 제3·7·9사단으로 영월 동남쪽의 남대리 부근 전투(제3사단:1. 14.~22.), 영월 부근 전투(제7사단: 1. 19.~24.)에서 적을 격멸했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2월에는 초순 평창군 창동리 일대와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공병단은 전투 병력의 신속한 기동을 보장할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 보수에 주력하면서, 때로는 직접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박 상병은 공병 분대장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하지만 그는 2월 5일 강원도 정선 부근에서 보급로 보수 작업 중에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무용 상병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50705 육)을 추서하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5-ㅍ-03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