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무술(박무술)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16913
  • 전몰일자 : 19510917

공훈사항

박무술 일병은 1918년 6월 6일에 경상남도 통영군 용남 연군에서 출생하였다. 박 일병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박 일병은 1950년 10월 15일에 입대 후 제7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일병이 입대했을 당시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1950년 11월 23일부터 12월 17일까지 전북 대둔산 지구 및 충남 일대와 경북 서부지역 공비소탕 작전에 투입되어 대둔산 지구 및 충남 일대를 담당하였다.
이후 사단은 12월 19일부로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며 38도선 상의 강원 인제군 원대리-현리-서림을 잇는 선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1950년 12월 31일에 시작된 중공군 제3차 공세 당시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었다.
제9사단은 원대리-서림을 잇는 방어진지에서 북한군 제10사단과 격전을 벌이다 상급 부대명에 의거하여 영월-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사단은 정선군 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1951년 4월 25일부로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8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5월 7일 미주리(Missouri)선(가리봉산∼인제 북방∼원통 북방∼미시령∼속초를 잇는 선) 확보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강원도 인제 동남방의 한석산, 가리봉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에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사단은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험준한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다. 현리전투의 결과로 제3군단이 해체되어 제9사단은 1951년 5월 29일부로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포천으로 이동했다.
제9사단은 와이오밍(Wyoming)선(캔자스선 북방 20km 내외의 철의 삼각지대를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중공군 제65군 예하 제165사단과의 격전 끝에 고대산을 확보했다.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 확보에 중요한 감제지형인 김화읍 계웅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1951년 6월 28일에 동 고지를 확보한 후, 7월 말까지 계웅산을 중심으로 한 김화지구전투에서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격퇴했으나, 이 전투에서 박 일병은 진지를 지켜내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1년 9월 17일에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무술 일병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1-ㅌ-027)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