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문식(朴文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33427
  • 전몰일자 : 19510106

공훈사항

박명호 일병은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9월 중순,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에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당시 미 본토로부터 증원된 미 제3사단으로 배치되었다.
박명호 일병이 일본에 왔을 때인 10월 중순에 미 제3사단은 한반도로 투입을 위해 부대 편성과 훈련을 하고 있었다. 사단은 8월 20일에 예하 제7, 제15연대와 함께 부대를 일본으로 긴급 전개함과 동시에 푸에르토리코에 주둔한 제65연대를 배속 받아 11월 10일에 완전 편성되었다. 박명호 일병은 미 제3사단 장병들과 함께 11월 17일에 원산으로 행정적인 상륙 후 항만과 비행장을 방호하며 잔류 게릴라를 소탕했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접촉하여 미 제10군단의 좌측을 보호하고, 미 제1해병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전을 면치 못할 때, 미 제3사단은 원산에서 흥남으로 이동하여 해병사단의 철수를 엄호했다. 한편 미 제3사단이 원산에서 흥남으로 북상한 기간에 적들이 원산을 점령함으로써 동부전선의 유엔군 부대들은 철수로가 차단되어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박명호 일병이 소속된 미 제3사단은 미 제7사단과 함께 12월 15일에 피해가 큰 미 제1해병사단의 흥남 철수를 지원했고, 이후 12월 17일 수도사단, 20일에 미 제7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고 최후에 홀로 남게 되었다. 사단은 24일 오전 11시에 마지막으로 철수했지만 미 해군의 함포지원사격과 미 공군의 항공화력 지원으로 큰 피해 없이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얼마 후 중공군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개시되어 중부전선이 위기에 처하자, 사단은 부산에서 부대 정비를 실시하다가 급히 평택 부근으로 이동하여 미 제8군의 예비가 되었다. 박명호 일병이 소속된 대대는 전방지역 투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951년 1월 6일에 후방으로 침투한 적 게릴라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전투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1판-6면-1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0-ㄴ-05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