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호(朴明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151045
  • 전몰일자 : 19510614

공훈사항

박명호 이등중사는 1920년 3월 7일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던 1950년 8월 22일 육군에 입대하여 간단한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의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는 안강 일대에서 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 전투였다. 방어전투라기보다는 핵심지역을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점령하는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였다.
박명호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하였다. 그들은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박 이등중사와 장병 모두는 용기백배하여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그와 연대병력이 삼척으로 철수해 강릉 부근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박 이등중사와 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벌어진 치열한 교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그는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그는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임진강과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이후 5월 7일 중공군 제6차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연대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박명호 이등중사는 1951년 6월 14일 고성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호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2148 육)을 추서하고 위패(03판-3면-23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5-ㅎ-0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