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철(朴命哲)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9537
  • 전몰일자 : 19511018

공훈사항

박명철 일병은 전라남도 고흥군 동양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이 38도선 상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1951년 4월 중순에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에 배치되었다가 육군의 병력배치 조정에 의거 동년 5월 하순에 제2사단 제17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명철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서울 북방-마석-용문산-홍천-하진부리-대관령-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당시 제2사단은 군단계획에 따라 적의 주력부대와 예비대가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섬멸하기 위하여 최대한 신속히 반격하기로 했다. 이에 사단은 5월 20일을 기해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하고, 5월 24일 오전 7시에 일제히 공격했다. 일명 가평-화천 진격전을 실시한 것이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계속된 수세에서 벗어나 38도선을 향해 일제히 공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미 제9군단은 5월 31일까지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잇는 와이오밍 선을 확보했다. 박명철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사창리-다목리-김화에 이르는 계곡통로의 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하여 6월 14일에 적근산(1073고지)을 확보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연대는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정찰 활동에 집중했다.
제2사단은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한 유엔사령부의 작전지침으로 8월 2일에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했다. 그러나 피아간의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은 8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결국 적의 역습으로 인해 다시 빼앗겼다. 이에 아군은 9월 1일부터 재차 공격을 시작하여 3일까지 격렬한 전투 끝에 고지를 탈환했다. 이후에는 전선은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정찰 활동에 집중했다. 당시 제2사단은 미 제9군단의 중앙 사단으로서 김화 동쪽의 송동에서 바조봉-승암고개-적근산 서측의 두목리에 이르는 일련의 능선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제2사단은 미 제9군단의 김화-금성 진공작전계획에 의거 10월 13일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박명철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사단의 주공으로서 전차 중대를 배속 받아 적근산 북쪽 기슭에서 출발하여 금성 서남쪽 직목동까지 진출하여 목표를 탈취했다. 그는 10월 18일 용감하게 전투를 수행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19-ㅊ-08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