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용(박명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217509
  • 전몰일자 : 19530514

공훈사항

박명용 일병은 1918년 11월 11일 경상남도 통영군 거제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공산군과 유엔군 사이에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1952년 6월 9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예하부대에 배치되었다.
박명용 일병이 전선에 투입될 당시 전황은 장기 교착상태에서 때때로 공격행동을 취할 때는, 다만 전초진지 주위의 주요고지를 목표로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부분 전선에서는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이 반복된 소부대전투의 연속이었으며 거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1952년 여름부터 공격작전을 개시한 북한군이 가을에 접어들어 전 전선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고 아군 전초진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1953년 초, 휴전회담이 여전히 중단된 상황에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피·아는 1952년 말까지 계속된 치열한 고지쟁탈전 후 전선정비를 하면서 휴전회담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목표로 하되 자신들의 입장 관철을 위한 영향력의 행사, 휴전과 관련하여 보다 양호한 방어선의 확보, 그리고 정치, 심리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의 종결 등 군사. 정치적 목적에서 새로운 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전략의 모색에 주력했다.
박명용 일병과 부대원들은 1953년 1~2월에는 전력증강과 진지공사에 주력하다가,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자 작전에 양호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공산군 전초진지에 대하여 제한된 규모이지만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4월 20일부터 시작한 상병 포로교환이 계기가 되어 4월 26일 중단된 휴전협상의 본회담이 6개월 만에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5월부터 하계공세, 즉 휴전 전 ‘최후의 공세’라 칭하는 대공세를 취했다. 박명용 일병이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반복되면서 공산군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박명용 일병은 중공군의 제1단계 하계공세에 따른 방어 작전에 참여하여 임무를 수행하다가 중상을 입고 부산에 있던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곳에서 의료진들의 적극적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53년 5월 14일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용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127-ㄹ-02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