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수(朴明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03010
  • 전몰일자 : 19501102

공훈사항

박명수 일병은 1932년 7월 10일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던 1950년 8월 16일 대구에 있는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25교육연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 요원으로 차출되어 美 제1기병사단에 배치되었다.
박명수 일병이 전선에 투입될 무렵 미 제1기병사단은 8월 30일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금호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왜관-741고지까지 담당하여 대구 북쪽의 방어진지편성에 주력하였다. 대구 정면의 북한군 제2군단의 제3공격집단에 편성된 제3· 제13· 제1사단 등 3개 사단이 9월 2일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다부동-대구 축선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유엔 전폭기 편대가 수암산 일대에 네이팜탄을 집중투하하는 동시에 사단 포병이 일제히 사격을 집중하였다. 폭격과 사단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철수하고 말았다.
제1기병사단은 9월 16일 대구 북방 전선을 돌파하여 왜관을 점령하고 낙동리 부근에서 도하를 실시한 후 상주 방향으로 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9월 18일부터는 공중지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날 왜관 서안 일대에는 B-29 폭격기 42대의 폭격이 실시되었으나, 주공인 제1기병사단의 전진은 진척이 없었다.
박명수 일병이 소속된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 12일 공격을 계속해서 금천 북방 9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한포리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박 일병과 장병들은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여 10월 18일 황주에서 비교적 기동로가 양호한 경의선 철도와 국도를 따라 북으로 진출하여 평양 남쪽 방향으로 공격하게 되었다. 10월 30일 기병사단의 주력부대들이 운산에 집결한 후 삭주로 공격하여 11월 1일 오후까지 공방전을 펼쳤다.
박 일병은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오직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박명수 일병은 1950년 11월 2일 운산 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0판-4면-08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3-ㄹ-09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