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섭(박명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51477
  • 전몰일자 : 19530510

공훈사항

박명섭 일병은 1925년 12월 28일에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 대인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22일,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수색대로 배치되었다. 수색대는 주로 적진에 투입하여 적정을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박명섭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초순, 제6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26일에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38도선까지 철수하여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1951년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 적산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사단은 용문산-가평-화악산-백암산 축선에서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하여 6월 중순에는 백암산을 좌우로 잇는 선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1951년 7월부터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방어진지 전방의 주요고지에 대한 공세행동을 하도록 예하부대에 지시했다. 이에 제6사단은 백암산 전방의 819고지와 교암산을 공세행동으로 탈취했다.
이후 제6사단은 1952년 1월 10일에 미 제9군단에서 배속해제 되어 양구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에 집중하고, 3월 22일에 미 제9군단에 재배속 되어 김화 부근의 거리실, 원남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40사단으로부터 방어진지 일부를 인수하여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잇는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유엔사는 1952년 6월에 포로교환 문제로 교착된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공세행동을 하도록 작전지침을 예하 부대에 내렸고, 이에 제6사단은 6월 12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금성천 북동쪽 A, B고지)를 공격하여 6월 15일 탈취했다.
이후 전선은 1953년 되어서도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박명섭 일병이 소속된 수색소대는 수시로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수집하여 사단에 보고했다. 그러던 중 수색소대는 5월 10일에 적진으로 침투하여 활동하던 중 적 부대에 발견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섭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03판-4면-03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ㅌ-07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