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규(朴明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1204827
  • 전몰일자 : 19511119

공훈사항

박명규 일등중사는 1929년 3월 18일에 충청남도 공주군 연용면에서 출생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정부수립 준비로 혼란스러웠던 1948년 6월 6일, 그는 충남 대전의 제2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제19연대가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될 때에 그는 제2연대에서 제19연대로 전속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적으로 침략했을 때, 박명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원주에서 춘천으로 신속히 투입되어 제7연대를 지원했고, 그리고 홍천으로 투입되어 제2연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6월 30일에 원주로 철수하면서 충주-문경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전을 수행했고, 8월 1일에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하여 8월과 9월 동안에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에 원주를 탈환하고, 10월 말에는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동두천 북방의 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 적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사단은 중공군의 2월공세, 중공군의 4월 공세,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공세적인 방어로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 장병들은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 이남까지 진출하였고,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철의 삼각지대의 우측 지역인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1951년 가을이 되면서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몰두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행동을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9월 21일에 제2연대가 먼저 방어진지 전방의 819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했고, 이어 박명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9연대가 9월 24일부터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28일에 819고지를 탈취했다. 그리고 사단은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공격하여 21일에는 교암산-송설리-송동리까지 진출했다. 이후 제6사단은 11월 17일부터 949고지를 공격하여 다음 날인 11월 18일에 탈취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중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으나, 11월 19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규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5593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ㄹ-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