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명경(박명경)

  • 군별 : 육군
  • 계급 : 소령
  • 군번 : 14676
  • 전몰일자 : 19520708

공훈사항

박명경 소령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국가의 간성이 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1948년 12월 7일에 육사 제8기로 입교하여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49년 5월 23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박명경 소령이 전선에 부임할 무렵 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벌어진 치열한 교전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 박 소령은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박 소령의 지휘하에 연대병력은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캔자스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5월 7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어 설악산 부근의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박명경 소령이 지휘하는 연대는 1951년 6월 3일부터 12일까지 향로봉지구 전투를 실시하여 940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어 8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 제8군의 작전에 참가하여 서화리 동북방의 924고지를 점령한 연대는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북한군 제19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탈취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2년 초반까지 쌍방 간에 합의되었던 임시휴전선이 백지화됨에 따라 회담의 추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수도사단은 후방지역 공비들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후방치안의 확보가 점차 어려워지게 됨에 따라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1952년 2월부터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과 반복수색을 전개하였다. 이어 5월에는 금성-북한강 동안까지의 전선을 인수하여 동부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박 소령의 지휘하에 연대병력은 1952년 7월 8일 지형능선을 공격해 점령했으나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물러나고 말았다. 생사기로에서도 지휘관으로써의 책임을 다했던 박명경 소령은 1952년 7월 8일 김화 부근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명경 소령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2423 국)을 추서하고 유해(33묘역-판-158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ㅍ-06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