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주(朴晩柱)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322664
  • 전몰일자 : 19510320

공훈사항

박만주 이등중사는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박 이등중사는 일어섰다. 그는 1950년 8월 하순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수도사단 제18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이등중사가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전황은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결전을 벌이고 있었고, 수도사단은 경북 기계 축선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연대는 기계, 안강전투에서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 돌파 위기를 해소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반격으로 전환했고,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연대는 23일부터 적을 추격하여 청송-춘양-영월-평창-38도선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강원도 간성-원통-양구-회양-신고산-안변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후 원산(10일), 함흥(17일)을 전령한 연대는 장진호, 부전호 방향으로 진격하여 28일까지 개마고원 일대에 다다랐다. 연대는 동해안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25일 청진을 점령하고, 30일 부령까지 진출하여 한·중 국경선을 목전에 두었으나, 이날 중공군의 참전으로 흥남으로 철수했다. 12월 10일 연대는 제3사단과 함께 흥남에서 해상 철수하여 부산에 상륙했고, 25일부로 제3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 장병들은 북한군 제2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분전했으나 진지가 돌파당하자 평창으로 철수했다. 연대는 1951년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연대는 미 제187연대전투단에 배속되어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상급부대 명령에 의거 12일 원주로 철수했다.
2월 21일 유엔군의 킬러작전이 개시되었고, 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강원도 횡성군 강림-안흥-봉화산 방향으로 진격했다. 연대는 봉화산을 탈취하기 위해 3월 1일부터 4일까지 혈전을 벌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봉화산을 점령하지 못하고 정선 일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3월 20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주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위패(08판-4면-23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6-ㅌ-07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