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이(朴万伊)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6803904
  • 전몰일자 : 19521129

공훈사항

박만이 일등중사는 1928년 1월 10일에 경상북도 울산군 운촌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21일,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박만이 일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중순, 제6사단은 평양 북동쪽의 성천을 탈환하고 희천을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 장병들은 유엔군의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로 압록강 변의 초산까지 점령하여 국경선 경계임무에 돌입했다. 이때 적유령 산맥 일대에 은거해 있던 중공군이 아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차단함으로써 아군은 청천강 일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유엔군은 11월 24일에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했으나 이때도 중공군의 후방 차단으로 아군은 다시 38도선, 그리고 평택-안성-장호원선으로 후퇴했다.
이후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38도선을 돌파하였고, 임진강-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캔자스선을 확보한 상황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대규모 공세행동 보다는 주로 방어진지 전방의 유리한 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진지전으로 변했다.
제6사단은 1952년 4월 2일부로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었고, 박만이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사단의 우측 지역인 765고지-교암산을 주저항선으로 점령하고, 그와 대대 장병들은 전진기지인 575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 고지는 대치하고 있는 적들에겐 눈엣가시처럼 돌출되어 있었다. 중공군들은 이 고지를 빼앗기 위해 4월 16일에 야간 기습공격으로 탈취했고, 이렇게 시작된 전투는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벌어졌으나 사단은 끝내 되찾지 못했다.
박만이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7연대는 5월 22일에 제19연대에 전방방어진지를 인계하고, 사단 예비로서 부대정비 및 수색작전 활동에 집중했다. 제7연대는 사단 예비로 활동하다가 10월 15일부로 사단의 전투지경선이 확장되면서 전방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사단 방어지역의 우측으로서 원래 방어하던 교암산을 좌우로 잇는 고지군이었다. 연대 장병들은 새로 인수한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수색 및 매복작전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중대는 11월 29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이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45-ㅈ-06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