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이(박만이)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2701730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박만이 이등중사는 1930년 11월 7일 경상북도 경산군 화림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혼란하던 1948년 7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 한 이후 박만이 이등중사는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 박 이등중사가 소속된 연대는 8월 12일부터 다부동-군위 일대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북한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으로 진출 중인 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미쳐 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연대는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박 이등중사를 비롯한 연대병력은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1950년 12월 31일 임진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중공군은 후속부대를 도하시켜 연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또 일부 중공군은 적성 남쪽 진지로 접근하며 추격해왔다. 이로인해 박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사격도 하지 못한 채 방어진지 일부를 돌파당하였고, 중공군이 내륙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사단의 우전방 지역에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박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밤새도록 돌파구 확대를 기도하는 중공군을 맞아 총력전을 펼쳤다.
1951년 1월 1일 박만이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두포리-금곡리-무건리 선에 배치되어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박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노고산 일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고자 새벽까지 고군분투하였으나 역부족이었으므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고양리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박만이 이등중사는 1951년 1월 1일 두포리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이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3판-6면-2784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0-ㅈ-08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