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우(박만우)

  • 군별 : 육군
  • 계급 : 중령
  • 군번 : 10474
  • 전몰일자 : 19510627

공훈사항

박만우 중령은 1924년 9월 13일 경상북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광복 후 조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947년 1월 13일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제3기로 입교하여 약 3개월간 교육훈련을 받고 동년 4월 19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박 중령은 제5연대에 배치되어 복무했으며, 6·25전쟁 발발 시는 제7사단에서 전선 방어에 매진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은 동두천, 포천과 창동방어선, 한강방어선의 노량진, 안양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었다. 사단은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재창설되었다. 북한군 8· 9월 공세 때 사단은 신녕지구 전투와 영천전투에서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조국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사단은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10월 8일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으로 진격했다. 사단은 11월 초순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쳤으나,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혀 순천-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사단은 영월-평창-하진부리 축선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중공군의 제3~제4차 공세를 막아냈다. 1951년 4월 초 개시된 유엔군 공세작전 때 사단은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 소양강 변의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 5월 공세 때 사단은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풍암리까지 후퇴했으나, 이곳에서 적의 돌파를 더는 허용하지 않고 진지를 지켜냈다.
북한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757고지, 917고지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일련의 전투에서 박 중령은 사단 참모로서 작전계획의 수립과 실행, 현장 지도 등에 매진했다. 그는 6월 27일 757고지 전투에서 현장 지도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우 중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18-ㄲ-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