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순(박만순)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307826
  • 전몰일자 : 19501110

공훈사항

박만순 일병은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북한의 남침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50년 2월경 제7사단 제3연대에 입대했다. 제3연대는 동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3연대는 포천 후방의 송우리와 창동방어선, 한강방어선의 역삼리, 과천, 군포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었다. 7월 16일부터 연대는 민부대(민기식 부대)의 일부로서 임실-남원-함양-하동-진주로 철수하면서 지연전을 펼쳤다. 이후 연대는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함안의 서북산 일대에서 격전을 치르면서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고, 포항전투에 투입되어 적을 격퇴했다.
연대는 8월 20일 대구에서 제5·8연대와 함께 제7사단 예하부대로 재창설되었다. 북한군 9월 공세 때 기계-안강 축선이 북한군 제12사단의 돌파로 위협을 받자, 연대는 9월 3일 수도사단에 배속되었다. 박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경주 부근의 무릉산 일대에 곧바로 배치되어 9월 6일부터 13일까지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비호산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11월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박 일병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11월 10일 장렬히 전사했다. 연대는 비호산을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17-ㅂ-05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