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수(朴萬洙)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716653
  • 전몰일자 : 19510402

공훈사항

박만수 하사는 1929년 5월 10일 경상북도 김천군 개녕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를 거듭하고 있을 때인 1950년 7월 13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의 전황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안강 일대에서 유격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 전투였다. 방어전투라기보다는 핵심지역을 국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점령하는 공방전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피아간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였다.
박만수 하사와 연대병력은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청송-평창-양양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으며,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박 하사와 연대병력이 삼척으로 철수해 강릉 부근에 배치되었을 때인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박만수 하사와 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1951년 1월 3일 양양 남쪽에 있는 원포리 일대에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강릉에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2월 25일부터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되었다.
박 하사와 연대병력은 3월 9일 속사리 일대 적 지역을 위력 수색해 북한군을 멀리 구축하였고 3월 26일 제2차로 38도선을 돌파한 후 계속 진격하여 4월에는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으로 임진강과 화천저수지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선)의 동단 남가리로 진출하였다.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박만수 하사는 1951년 4월 2일 임진강 부근 전투에서 푸른 청춘을 남겨둔 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6판-5면-07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4-ㅌ-07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