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수(朴萬壽)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221411
  • 전몰일자 : 19510219

공훈사항

박만수 이병은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 발발 후 북진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할 당시, 1950년 11월 중순경 입대하여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7경비대대로 배치되었다.
박만수 이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 편성에 전념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육군본부는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과 보급로 확보, 포로경비 등을 위해 1950년 11월부터 51년 4월까지 육본 직할로 14개 경비대대를 창설했다.
박만수 이병이 소속된 제7경비대대는 국일명 122호에 의거 1950년 12월 14일 경상남도 부산에서 제6경비대대와 병행하여 창설되었다. 제7경비대대는 육군 예비로서 공비 토벌 및 도로 경계 등 후방지역 치안확보와 포로 경비를 목적으로 경상남도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후방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던 지방 게릴라들과 합세하여 점차 전력을 재정비하고,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전투근무지원시설들을 습격했다. 이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38도선으로 내려오자 전선 타격부대와 배합전술을 펼치면서 유엔군의 후방을 더욱 적극적으로 교란했다. 그리고 때로는 우익 인사에 대해 테러를 하거나 민간인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제7경비대대는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1년 2월 18일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덕천강 계곡에 적이 출몰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박만수 이병은 분대원과 함께 즉각 출동하여 수색작전을 하다가 적 게릴라와 조우하여 교전 중 많은 적을 사살하며 전과를 올렸으나,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부산에 위치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신속하게 치료를 받았으나 증상이 악화되어 다음날인 2월 19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수 이병의 혁혁한 전공을 표창하여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51505 육)을 추서하고,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85-ㄹ-055)에 그의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