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만규(박만규)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901457
  • 전몰일자 : 19510101

공훈사항

박만규 하사는 경상남도 함양군 군북면 원북리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7월 13일 육군에 입대하여 간단한 기초 군사훈련만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8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만규 하사가 전선에 배치될 당시 수도사단은 제1연대와 제18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단은 미군이 방어하고 있던 금강선과 대평리 선이 위태롭고 또 청주 국사봉 방어선이 언제 돌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7월 17일 보은을 거쳐 20일 안동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이 안동 북쪽에서 계속 공격해오자, 박 하사와 장병들은 8월 1일 안동 북쪽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엄호하면서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박만규 하사와 장병들은 8월 3일 길안과 청송 일대에 새방어선을 설정해 이곳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진지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의성 일대로 다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9-12일 사이에 청송-죽장-기계 축선으로 공격하여 기계와 포항을 점령하였다. 박 하사와 일부 병력은 16일 안강 북쪽 양동리 지역으로 투입되어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계를 탈환하였다.
박만규 하사와 연대병력은 북한군의 9월 공세의 일환으로 적 제12사단이 비학산 일대에서 공격해 오자, 9월 4일 안강을 포기하고 경주 북방에 있는 낙산(호명리)으로 철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와 연대병력은 9월 말 양양까지 진격하면서 38도선을 회복하였다. 이어 10월 1일 하조대 부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박 하사와 장병들은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한 후 함경북도 길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12월에 접어들어 박 하사와 연대병력은 북한지역을 포기하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방지역이 중공군에 의해 차단되면서 해상 철수를 위해 흥남에 집결하였다.
박만규 하사는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북한군에 맞서 싸우던 중 1951년 1월 1일 가평부근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만규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0판-2면-26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ㅌ-03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