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로운(朴魯雲)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2605523
  • 전몰일자 : 19510211

공훈사항

박로운 이등중사는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과 자유를 지키고자 1949년 7월 22일 홍천 지역의 38도선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인 제6사단 제8연대에 입대했다.
제8연대는 1950년 6월 20일 서울로 이동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 예속되었고, 이동한 지 이틀 만에 전쟁을 맞았다. 연대는 김포, 영등포 일대에서 적과 싸웠고, 진천-미호천-보은-안동 일대로 지연전을 펼치다 전투력의 소진으로 7월 23일 해체되었다.
8월 20일 연대는 제3·5연대와 함께 제7사단 예하부대로 재창설되어 신녕지구 전투와 영천전투에서 적의 돌파를 저지하고 영천을 탈환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최대 위기를 극복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연대는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 후, 20일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고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가 되었다. 북진을 계속한 연대는 11월 초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전투에서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격퇴함으로써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다. 연대는 묘향산 전방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후 연대는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1951년 1월 중순경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연대는 공격을 개시하여 만경대산, 785고지, 계족산을 차례로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한 후, 24일 영월을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이 물러남에 따라 1월 25일 사단은 공세로 전환하여 평창 북방으로 진출했고, 2월 초순까지 횡성 동북방의 창동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은 횡성-원주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2월 11일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고, 돌파구 측방의 창동리에 배치되었던 사단은 측방이 노출되면서 20km 정도 후방으로 철수했으나, 적은 틈을 주지 않고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이등중사는 소대원을 이끌고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2월 11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로운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려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0123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32판-3면-23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ㄲ-08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