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로영(朴盧英)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0261
  • 전몰일자 : 19510517

공훈사항

박로영 중위는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8월 23일, 부산 동래의 육군제병학교로 입교하여 4주간의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한 후 소위로 임관하여 제6사단 공병대대로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공병중대는 제7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박로영 중위가 부대로 전입했던 1950년 9월 하순, 제6사단은 원주 일대에서 반격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하였고, 10월 23일에 평북 희천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4일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 11월 24일에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그때마다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를 받아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당시 제6사단은 12월 중순에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얼마 후 대규모 병력을 이룬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제6사단은 전곡-백의리를 잇는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1951년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 적산리로 이동했다가 2월 초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로 이동하여 중공군의 추후 예상되는 공세에 대비했다.
제6사단은 2월 12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 시에 판대리 방어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돌파구 확장을 방지했다. 박로영 중위가 소속된 공병중대는 장애물을 적극적으로 설치하여 사단의 작전에 기여했다. 이후 제6사단은 반격으로 전환하였고, 3월 22일부터 북배산-수덕산-지암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21일에 사창리까지 진출했으나,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로 사단의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큰 피해를 받고 철수하여 4월 27일에 용문산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6사단은 중공군의 공세에 대비해 방어배치를 조정했다.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추진 배치하고 주저항선인 용문산에 제7, 제19연대를 배치했다. 얼마 후 중공군은 5월 16일에 대규모 공세(일명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6사단은 전초진지에서 제2연대가 강력하게 저항했다. 중공군은 전초진지를 주진지라 생각하고 더욱 강하게 공격했다. 박로영 중위가 소속된 공병중대는 방어진지 전방에 철조망과 지뢰지대를 적극적으로 설치하고 거부장애물을 폭시시켜 적의 공격을 둔화시켰다. 그는 5월 17일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로영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68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ㅌ-091)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