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래영(朴來英)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1204833
  • 전몰일자 : 19530717

공훈사항

박래영 이등중사는 1930년 1월 11일에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8년 4월 중순에 충남 대전의 제2연대로 입대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6월 12일부로 제6사단에 예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여 제8연대로부터 홍천 북방의 방어진지를 인수했다.
제6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홍천 북방에서 3일간 지연시키고 철수하여 횡성-충주-이화령 축선에서 7월 말까지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하고, 신녕 북방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및 9월 공세를 격퇴했다. 유엔군은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9월 16일에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하여 불과 40여일 만에 압록강 변까지 진출했다. 이때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고,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 이어서 중공군의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격퇴하고 5월 20일에 용문산으로부터 반격하여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공산군이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휴전협상을 지연하자, 유엔사는 군사적 압박이 필요하다고 보고 각 부대에 공세적인 작전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박래영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21일까지 공격하여 교암산(770고지)을 탈취했다. 이후 사단은 몇 번의 부대교대를 거쳐 1952년 3월 22일에 김화 부근으로 이동하여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당시 제2연대는 6월 11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금성천 동북방 A, B고지)에 대해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6월 15일 탈취했다.
제6사단은 연대별 교대로 전방과 예비를 담당했는데, 제2연대는 1953년 5월 17일부로 사단의 예비가 되었다. 제19연대는 방어지역 서측인 교암산 지역을 담당했다. 중공군은 7월로 접어들면서 휴전협상이 타결될 기미가 보이자, 휴전이 성사되기 전에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7월 10일 오전 7시부터 교암산을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했다. 박래영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7월 12일부로 교암산 지역을 인수하여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자 했으나, 7월 14일 오후 3시부터 주파령-적근산을 잇는 선으로 철수했다. 이어 중공군은 7월 17일에 최후 공격을 했으나, 연대 장병들은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래영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8판-5면-02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6-ㅅ-04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