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현(朴斗鉉)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K1133721
  • 전몰일자 : 19510624

공훈사항

박두현 이등중사는 1928년 9월 6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20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철수했던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 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다.
박두현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한 후, 2월 3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7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51년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다시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2월 25일 중공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박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을 신속히 속사리 부근으로 투입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인하여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써 공격이 지연되었고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박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는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지를 함락 당하였다. 6월 4일 짙게 낀 안개로 관측이 불가한 틈을 이용하여 적은 강력한 박격포 사격의 엄호하에 박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의 전초진지인 산두곡산과 원봉 전장의 1209고지를 공격해 왔으나 치열한 격전을 펼쳐 격퇴시켰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최후까지 용감히 싸웠던 박두현 이등중사는 1951년 6월 24일 고성 부근 전투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최후까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현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18묘역-6판-395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5-ㅍ-01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