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하(朴斗夏)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500494
  • 전몰일자 : 19521006

공훈사항

박두하 하사는 1930년 8월 10일에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초기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하던 1950년 7월 15일, 경북 대구의 제25교육연대로 입대하여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박두하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8월 중순, 제6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의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38도선 상의 방어진지,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를 잇는 고지군으로 철수했다.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부터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 2월 공세, 4월 공세, 5월 공세를 실시했고,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하여 38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가 거듭되다가 1951년 6월 23일에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대규모 기동전을 멈추었다. 당시 제6사단은 백암산을 좌우로 잇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진지보강과 수색작전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몇 번의 부대교대를 거쳐 1952년 3월 22일에 미 제9군단에 재배속되어 김화 부근의 거리실, 원남 일대로 이동하여 미 제40사단으로부터 방어진지 일부를 인수했다. 사단은 4월 5일부로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그가 소속된 제2연대는 봉화산(477고지)-교암산(770고지)을 잇는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주간에는 수색정찰과 방어진지 보강, 야간에는 매복작전에 집중했다. 얼마 후 유엔군사령관은 포로교환문제로 교착된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공세적인 작전을 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제6사단은 6월 12일에 방어진지 전방의 감제고지(금성천 북동쪽 A, B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6월 11일에 공격하여 15일에 탈취했다. 그러나 적의 계속된 역습으로 전투는 그치지 않았다. 이 무명고지는 피아를 감제 및 관측하는데 주요한 지형이라 서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선은 8월로 접어들면서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이 9월 29일에 아군의 전초기지(금성천 북동쪽의 A, B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다. 박두하 하사가 소속된 제2연대는 10월 1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공격을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6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9017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위패(29판-4면-02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5-ㅎ-05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