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하(朴斗夏)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14858
  • 전몰일자 : 19500725

공훈사항

박두하 일병은 1916년 2월 25일에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공산세력들의 침투 및 교란활동으로 사회가 혼란하던 1950년 1월, 군 입대를 결심하고 육군훈련소로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본부로 배치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남침하자,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수행하면서 반격을 모색했다. 미 지상군 중 한국에 첫 번째로 참전한 미 제24사단은 통역 및 안내 요원이 필요했고, 박두하 일병은 통역병으로 미 제24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때는 정식으로 카투사(KATUSA) 제도가 생기기 전이었다.
미 제24사단 소속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에 오산 북방 죽미령에 배치되었으나, 전투력 열세로 북한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리고 후속으로 도착한 미 제34연대는 스미스특수임무부대원들을 수습하여 천안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후 사단은 제34연대가 천안에서 공주 지역으로 철수하여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금강전투에서, 후속하여 도착한 제19연대가 대평리 지역에 배치되어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대평리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7월 17일부터는 대전방어에 들어갔다. 사단장은 최소한 7월 20일까지는 대전을 지켜야 했다.
북한군은 제3사단, 제2사단, 제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사단 등 4개 사단이 미 제24사단을 대전에서 완전히 포위섬멸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7월 19일 아침에 6대의 야크기로 공중공격과 함께 포위작전을 단행했다. 미 제24사단은 결국 7월 20일에 새벽 3시에 적의 대전시내 진입을 허용하였다. 이날 하루 종일 시가전이 계속되었고, 새로 개발된 대전차무기인 3.5“로켓포로 적 전차를 여러 대 격파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로 대전을 지킬 수 없어 철수하여 미 제1기병사단 엄호 하에 영동으로 철수했다.
이후 미 제24사단은 김천, 군위, 의성 일대에서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북한군 제4사단이 거창 방면으로 진격하는 한편 제6사단이 광주-순천을 점령하고 진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부산을 위협하자, 미 제24사단은 7월 25일에 긴급히 거창과 진주 방면에 투입되었다. 한편 박두하 일병은 통역요원으로 미군 장병들과 함께 전투하였으며, 7월 25일에 거창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0판-8면-2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9-ㅌ-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