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천(朴斗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등중사
  • 군번 : 0749798
  • 전몰일자 : 19530720

공훈사항

박두천 일등중사는 1926년 2월 18일에 경상남도 울산군 두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을 준비하던 1951년 4월 중순, 양양에 주둔한 제11사단으로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3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두천 일등중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6월 중순, 제11사단은 강원도 양양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거진-건봉령 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쌍방은 더는 공격하지 않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고 공산군의 공격 의지를 꺾기 위해 공세행동을 하도록 각 부대에 명령했다.
제11사단은 8월 17일에 아군 방어진지를 감제하고 있는 향로봉 북방의 884고지를 탈취하기로 했다. 박두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3연대는 8월 24일까지 계속된 공방전 끝에 884고지를 탈취했다. 이후 연대는 11월 17일에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 방어지역을 인수했다. 이날 북한군 제9사단은 빼앗겼던 월비산을 되찾기 위해 부대가 교대되는 취약시기를 놓치지 않고 11월 18일에 공격했다. 연대 장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11월 24일에 빼앗기고 351고지로 철수했다.
박두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1사단은 1952년 1월 중순에 작전지역을 제5사단에게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에 전념했다. 다시 1952년 3월 30일에 국군 제1군단에 재배속되어 건봉령 일대의 방어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전선의 소강상태는 1953년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사단은 6월 10일에 방어진지를 제21사단에 인계하고, 간성에서 화천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당시 중공군들은 휴전협정이 타결되기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7월 13일 야간에 중동부전선의 교암산을 공격했다.
박두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3연대는 인접의 제20연대와 함께 7월 15일부터 적근산-삼현지구로 반격하여 7월 19일에는 주파리-적근산까지 진출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소대선임하사로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7월 20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천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74-ㅊ-04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