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용(朴斗龍)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219851
  • 전몰일자 : 19511025

공훈사항

박두용 이등중사는 1928년 8월 12일에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출생하였다. 박 이등중사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박 이등중사는 1950년 10월 22일에 입대 후 부산에 있는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동년 10월 25일에 제9사단이 창설됨에 따라 제9사단 제30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이등중사가 부대에 전입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은 1950년 10월 1일에 38도선을 넘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제9사단은 10월 25일에 서울에서 제28·제29·제3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창설되었다.
한편 아군이 북으로 진격함에 따라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잔류 병력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동시에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후방지역작전을 하던 미 제9군단과 예하 미 제2·제25사단은 청천강 선으로 투입되었다.
따라서 국군 제3군단이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제9사단은 1951년 4월 25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8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5월 7일 미주리(Missouri)선 확보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강원 인제 동남방의 한석산, 가리봉 일대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에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사단은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험준한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다.
현리전투의 결과로 제3군단이 해체되고 제9사단은 1951년 5월 29일부로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포천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와이오밍(Wyoming)선을 확보하기 위해 1951년 6월 3일부터 11일까지 중공군 제65군 예하 제165사단과 격전을 벌인 끝에 고대산을 확보했다.
이후 사단은 철의 삼각지 확보에 중요한 감제지형인 김화읍 계웅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6월 28일 동 고지를 확보한 후, 계속되는 적의 역습을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이등중사는 진지를 지켜내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용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8-ㅇ-08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