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만(朴斗滿)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74781
  • 전몰일자 : 19510115

공훈사항

박두만 일병은 1916년 5월 10일 경상북도 월성군 양남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일병은 1950년 9월 19일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통신중대에 배치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사단은 9월 29일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제8사단을 후속, 경주-안동-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사단은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2일 개천 동쪽의 비호산 일대에 배치되었다.
11월 3일 사단은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사단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사단이 비호산을 확보함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사단은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사단은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습격당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한 채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사단은 12월 3일부터 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춘천 부근의 38도선 일대에 진지를 편성하고 방어준비에 매진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사단은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사단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하고, 제2군단이 경북 안동까지 종심 깊게 침투함에 따라 사단은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이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일대에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 침투부대를 격멸하기 위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이 시기 박 일병은 지휘통신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월 15일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만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51-ㄱ-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