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만(朴斗滿)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5601
  • 전몰일자 : 19520720

공훈사항

박두만 일병은 강원도 삼척군 삼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38도선 일대에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던 1951년 1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로 차출되어 미 제7사단에 배치되었다.
박두만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2월 중순, 미 제7사단은 평창 남서쪽, 그리고 원주 동남쪽 백운산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2월 1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맞아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2월 21일부터 제천-평창 축선으로 반격하여 평창 북쪽의 대미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3월 5일부터 현리-인제 축선으로 공격하여 3월 말에는 현리 직전의 방태산까지 진출했으나, 이때 미 제17연대는 양구로 공격방향을 전환하여 4월 21일에 양구를 탈환했다. 그러나 4월 22일 야간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4월 공세’로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했다.
박두만 일병이 소속된 미 제7사단은 5월 1일부로 미 제9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홍천 서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반격작전으로 홍천에서 춘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중에 5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5월 공세’를 맞아 홍천 남서쪽 일대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5월 23일부터 홍천에서 춘천-화천 방향으로 반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을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여 6월 13일에는 적근산-주파령을 잇는 선까지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사단 장병들은 주로 방어진지를 보강하면서 수색 및 매복작전에 집중했다. 이는 1952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박두만 일병이 소속된 중대는 7월 20일에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부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만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4판-2면-03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90-ㅈ-09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