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두만(박두만)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중사
  • 군번 : 0160577
  • 전몰일자 : 19510409

공훈사항

박두만 이등중사는 경상남도 울산군 상비면 길천리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23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박두만 이등중사가 전선에 배치될 무렵 사단은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제3사단과 함께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였고, 원산, 함흥, 성진을 점령한 후 계속 진격하여 11월 25일 청진을 점령하고 30일에는 부령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1일 청진에서 철수한 연대는 12월 17일 흥남항에서 철수하여 18일 묵호에 상륙한 후 제9사단의 양양-서림간 방어선을 인수하였다.
박두만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1951년 1월 10일 송계리-삼척선으로 철수한 후, 2월 3일 공격을 개시하여 2월 7일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951년 2월 11일에 개시된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전 전선이 밀리게 되자 다시 송계리-삼척 선으로 철수하였다. 그와 장병들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박두만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2월 25일 북한군의 저항이 경미하여 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하여 속사리로 진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5일간이나 계속된 폭설로 인하여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됨으로써 공격이 지연되었고, 제설작업 끝에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1개 대대를 투입 2개 대대 병진공격을 개시하였고, 2일에는 하진부로 진출하여 접적이 개시되었다. 이후 박 이등중사와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박두만 이등중사는 포위공격을 시도하는 북한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951년 4월 9일 양양 전투에서 북한군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두만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2554 육)을 추서하고 위패(04판-2면-27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09-ㅍ-04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